“Happy Lunar New Year!”
새해의 시작은 어떠셨나요?
저는 새해 첫 날을, 두 편의 영화로 시작했습니다.
두 영화는 모두 외국 영화이고, 아, 두 편 모두 아시아 영화이네요.
한 편은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Drive my car”, 그리고 다른 한 편은 중국 영화 “원세컨드, One second”입니다.
느낌(기대) 그리고, 경험
일단 두 편을 고른 이유는, 늘 그렇듯 “느낌(기대)”입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시놉시스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그리고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조합이 꽤 좋으리라 여겨졌어요. 호평도 많더군요.
“원 세컨드”는, 뭐, 말할 필요 없이, 장예모 감독의 신작이면서, (중국 땅에서) 영화라는 대상에 담긴 어떠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여겨져, 한동안 영화를 본의 아니게 멀리 해 온 저에게, 의미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맞으리라 여겨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편은 보기 전 느낌(기대) 이상, 다른 한 편은 보기 전 느낌(기대 또는 안타까움)만큼의 영화가 되어 각각 좋은 경험이자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통해서 그 의미를 함께 공유해볼까 합니다.
TABLE OF CONTENTS
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 다시 쓰는 시놉시스
우선,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데, 먼저,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조금 고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연출가이자 배우이기도 한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는 배우에서 극 각본가가 된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분)와 원만한 듯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후쿠”와 “오토” 모두 대본을 쓰고 읽는데, 그 “대본”에는 서로가 묻어 있습니다.
“가후쿠”는 아내 “오토”가 녹음한 대본으로 자신의 작품 “바냐 아저씨”(극작가 체호프의 장막극 “Uncle Vanya”를 원작으로 하는)에서의 연기를 연습합(그 극을 머리 속에 그립)니다. “가후쿠”의 호흡과 흐름에 맞추어 녹음된 아내 “오토”의 녹음 대본은 그가 이동하는 차(보기만 해도 연식이 느껴지는 오래동안 타 온 그리고 운전해온 차) 안에서 더없는 동반자이자 극의 전부가 되어줍니다. 아마, “가후쿠”에게 아내 “오토” 또한 그런 존재이겠지요.
반대로, “가후쿠”는 아내 “오토”가 관계에서 절정이 왔을 때 내뱉는 일련의 이야기를 기억해두었다가 다음날 그 내용을 정리하여 (그 기억이 사라진) 아내에게 전달해주어 아내가 대본을 완성하게끔 돕습니다. 그 이야기는 한 소녀의 이야기인데, 심야 방송이라 가능한 수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렇듯, 삶의 동반자이자 서로의 예술의 동반자이기도 한 두 사람의 관계에는 그러나,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아내 “오토”의 외도. “가후쿠”는 그런 아내의 비밀을, 모르는 척 묻어두려 하였으나, 그것은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죠.
그러던 어느날, 그런 “가후쿠”에게 아내 “오토”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없는 약속을 핑계로) 볼 일이 있다며 나간 “가후쿠”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주막하출혈로 인한) 아내의 주검.
시간은 흘러 2년 후, 그는 히로시마의 한 연극제에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고자 가게 되고, 연극제 측으로부터 이전에 있었던 사고를 이후로 해당 극 상연까지 “가후쿠”의 차 운전을 대신해 줄 “운전수”를 고용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극구사양하는 “가후쿠” (일단 한 쪽 눈이 녹내장인 “가후쿠”의 상황에 더불어) 그러나 우선 한 번 시운전을 통해 결정해보는건 어떻겠냐는 연극제 측 “윤수”(진대연 분)와 운전수 “미사키”(미우라 토코)의 이야기에 못이기는 척 운전대를 맡기게 됩니다.
중력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운전 능력의 “미사키”는 이 날 이후, “가후쿠”의 차의 운전대를 잡게 되고, “가후쿠”는 자신의 작품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전까지와는 여러모로 다른, 여정에서 말입니다.
이전 저의 “오롯이 영화를 비추다”를 보아오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기존의 시놉시스와 다른 줄거리 쓰기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대개의 경우, 기존의 시놉시스가 작품을 잘 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더 흥미롭게 쓰여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뻘짓(시간 대비 의미 없음)을 하는데, 이번의 경우에는 원래의 소개의 “말없이… 조용한 차안에서… 눈 덮인 홋카이도…” 같은 부분이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시 써보았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예술, 그리고 끝나지 않은 삶의 여정
영화는 시놉시스와 초반부만으로 보자면, “아내의 외도와 갑작스러운 죽음에 상처 받은 연출가가 여성 운전수와의 소통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이겨내고…” 같은 이야기를 그려보게 되지만, 사실, 좀 더 다른 곳에 많은 것을 두고 있습니다.
단어로 표현하자면, “예술”, (좀 더 풀어서 좀 더 더해서 이야기하자면, “언어”, “소통”, “관계”, “작품”) 그리고 삶입니다.
“오토”가 영화 전반에 드리워져있고, “가후쿠”와 “미사키”의 이야기가 영화 전반을 받치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를 더 몽글몽글하게 하는 것은 히로시마 연극제의 “바냐 아저씨”의 상연까지 펼쳐지는 더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와 사건들입니다.
“가후쿠”의 극 “바냐 아저씨”는 특이하게도 각 인물들이 서로 다른 언어(예컨데, 일본어/한국어/중국어/영어 등)로 대사를 하며 이루어집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히로시마의 극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수화를 사용하여 대사를 하는” 인물 “이유나”(박유림 분)라는 인물을 통해 이러한 “가후쿠”의 극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사실, 영화를 보며 몇 차례 실망할 뻔(!)한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예컨데, “미사키”의 첫 등장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일종의 소설 속 지문 같은(참고로,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원작을 바탕으로 나왔습니다) 그녀에 대한 묘사에 잠시 동공지진(감독님에 대한 믿음에 잠시 균열)이 있었고, 그 동공지진이 잠시 이어졌었는데요.
이 동공지진을 금새 잊게 만든 것이 바로 극 “바냐 아저씨”에 지원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였습니다.
영화 속에는 두 편의 “극”이 등장하는데, 한 편은 “고도를 기다리며”이며 다른 한 편은 극 중후반부를 이끄는 “바냐 아저씨”입니다.
“가후쿠”는 “고도를 기다리며” 상연 후 “다카츠키” (오카다 마사키)를 처음 만나고,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침잠합니다.
이후, “바냐 아저씨”를 통해 “미사키”와 많은 배우들을 만나게 되는데(“다카츠키”를 다시 만나기도 하였구요.), 각 “극”이 지닌 서로 다른 결의 메세지만큼 “가후쿠”와 “미사키”의 결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극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는 그리고 극과 영화의 중심메세지를 전하는 “소냐” 역의 한국인 배우 “이유나”는 말을 하지 못하기에 수화로 소냐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그런 그녀는 영화 중반 그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가후쿠”, “미사키”와 함께 한 자리를 통해 이 영화가 지닌 여정의 결을 바꾸는데요. 이외에도 “다카츠키” 등의 인물들은 영화 속 여정의 결을 끊임없이 바꾸며, “가후쿠”와 “미사키”의 삶의 여정을 딛어낼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무색무취, 그저 필요한 묘사만을 더해 그려진 듯 한 “미사키”의 등장이 그러했던 이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극”의 인물들(을 연기한 배우들)이 가진 이야기들과 의미들이 “가후쿠”의 여정에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극”을 통해 그리 상연되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이렇듯 어떠한 위로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가후쿠”와 “미사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극”(예술)이 지닌 힘을 풀어내는 제한되지 않는 “언어”(소통)와 그 사이의 “관계”(작품을 이루는 작품내외의 많은 존재)를 통해 직면하고 풀어내고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순간들이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며, 남편이자 XX(스포 방지)였던 “가후쿠” 그리고 Y(스포 방지)이었던 “미사키”의 한 발 더 내딛은 삶의 여정을 비춥니다.
(그렇게, “Drive my car”가 지닌 의미 역시 조금은 바뀌게 되네요.)
그리고, 그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자 이 영화의 끝에서, 어쩌면 예술과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을 당신 그리고 저에게 어떠한 의미와 위로를 전해줍니다.
살아가라.
때론 지금까지의 차의 동반자와 함께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금까지의 차의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라도, 계획치 않았던 또는 원치 않았던 누군가를 그 차에 태우거나 또는 지켜 보아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차를 떠나보내거나 또는 어제가 담긴 그 누군가의 차를 이어 받더라도… 여전히 소중한 자신의 삶의 여정을 이어가라고.
드라이브 마이 카: 섬세하고 다채롭게, 천을 새겨낸 조각가처럼
세 시간의 러닝타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길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주연인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호연과 무시할 수 없는 (딱 맞는) 비주얼과 그외 배우들의 다채로운 앙상블이 흥미로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목표의식 분명한 섬세하고 다채로운 표현들이 영화의 결을 끊임없이 생동감있게 합니다.
“예술”과 “삶”이라는 주제에 한번쯤을 해보았을 많은 고민들과 그에 대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가이드들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 잘 모르는 제가 봐도 우와~할만큼) 다양한 표현들로 새겨넣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후쿠”, “미사키”, “다카츠키”의 엇갈림의 장면은 마치 이 영화를 “극”에 투영시켜낸 듯 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펼쳐놓고 보면, 돌로 깎아낸 천의 질감 같이 섬세하고 유려하게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의의 끝에 완성해낸, “예술”을 통한 “삶”(여정)에 대한 찬가는, 과거 그 어느 조각가의 수려한 작품을 떠오르도록 합니다. “영화”라는 장르의 “예술”이 그려내는 감동과 함께 말입니다.
p.s.
그리고 여담이지만,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두 가지 트라우마를 극복(또는 겪지 않고 편안히 관람)하였는데요.
하나는 “지붕뚫고하이킥”의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트라우마이고, 다른 하나는 “빛나는”의 “기승전키스” 트라우마인데요. 빗 속을 질주하는 차 안의 남녀만 보면 뭔가 막 걱정되는 분들과 일본 영화에서 뭔가 차이 많이 나는 남녀가 서로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을 보면 갑자기 키스씬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영화에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요. 그럼요.)
원세컨드
원세컨드: 그 어떤 시대의 예술과 삶
그냥,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영화 원세컨드를 보고 나서는 극장의 걸음은 조금은 무거웠습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국가 홍보 영상(중화 뉴스)을 보아야 하던 시절, 이를 필름통에 담긴 필름이 지역과 지역을 오가며 상영되었던 시절, 이러한 상영을 마을주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된 그 어느 때에, 한 남성(장구성, 장이 분)이 사막을 건넙니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도박 같이 느껴지는 그의 여정의 유일한 목표는, 어느 중화 뉴스 필름 속에 담긴 자신의 딸의 모습을 보는 것. 그런 그의 여정에, 갑자기 한 아이(류가네 딸, 류규녀, 류하오춘 분)가 끼어듭니다. 그 아이의 목표는, 어떠한 것이든 필름을 훔쳐 전등갓을 만드는 것. 필름 속 딸을 보아야 하는 그와 필름으로 만든 전등갓이 필요한 소녀, 이 둘의 목표는 대치되었기에, 다툼이 일어나며 위기의 순간에 봉착하지만, 그들이 서로의 간절함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목표는 서로의 목표를 감싸안습니다. 비록, 그 시절이 그들을 품지 못한다 할지라도.
앞서 직전에 본 “드라이브 마이 카” 속 인물들이 비록 처연한 삶의 상황 속에 처해있을지라도 그들은 예술 그리고 소통을 통해 그들의 상황을 풀어갈 수 있는 시대에 놓여져 있습니다. 반면에, “원 세컨드”의 두 주인공에게 예술(영화)과 이에 투영되는 존재(딸의 모습 또는 전등갓)는 너무도 아득히 그리고 절박하게 보여지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영화 속 딸의 모습을 보거나 필름으로 전등갓을 만드는 일)마저도 쉬이 용납되지 않는 그리고 향유되지 않는 영화 속 상황은, 이 이야기가 한 탈주자와 꼬마 도둑(이 될 뻔했던) 아이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그런 그들을 둘러싼 도덕적인 세상이 사실은 정반대로 존재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하며 더욱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장예모 감독의 새로운 작품은, 작금의 중국의 현실을 가늠하며 본다면, 가장 안전하나 절박하게 그려낸 알레고리(다른 존재에 의해서 암시적으로/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와 같이 느껴집니다. 분명한 거장의 수려한 감성으로, 그러나 조금은 희뿌연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 너머의 무언가와 같은) -누군가에겐 추억 너머의/누군가에겐 제한 너머의- 작품으로 말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니, 영화 중반 주인공과 아이가 극장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의 어느 순간의 이음새가 대단히 이상합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함께 느끼셨을 이 이상한 이음새의 순간은, 두 인물간의 대화에 이어 주인공이 무언가를 느낀듯한 반응을 하는 사이에 존재하는데요. 마치 영화 속 상영사(범전영, 판웨이 분)가 선보인 편집술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그 찰나의 순간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덧이어져 있었다면, 그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1970년대 문화대혁명의 시대는 시간적으로 분명 먼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022년 영화 “원세컨드”는 그 시절의 “영화에 대한 향수”를 어쩌면 가장 시의적절한 시기에 꺼내온, 어쩌면 참 꾹꾹 눌러 담아진 오늘의 삶에 대한 외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말미, 사막에서의 아이의 팔날개짓과 주인공과 아이의 웃음 씬은, 묘하게 영화 “산이 울다”를 비롯한 중국 영화에서 보아온 어느 장면들과 기시감이 있었는데요(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산이 울다” 엔딩 씬 복습). 어쩌면, 이러한 장면들이 중국 영화가 지켜가고 아니 성취해가고 있는 그 어떠한 고귀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또한 장예모 감독의 성취임은 분명하나, 보다 진일보된 그의 작품을 이어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예술(영화)과 삶 그리고, 나
지난 반 년여간, 극장을 거의 찾지 못하였습니다.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과 무언가 완성의 지점이 없는 업무로 인한 자기혹사로, 그리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몇 가지 일(목표)들로, 극장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새해 들어 첫 날은 꼭 영화관에서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묘하게도 두 편의 영화는, 보기 전의 기대보다 더욱, 영화라는 장르가 그리고 예술이 지닌 가치와 위로 또는 정서적인 울림을 강하게 전해주었습니다.
두 편 중, 특히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우 장면마다 주석을 달고 싶을만큼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산물들과도 이어져 있기에 더 나누기 즐거우리라 싶었는데요.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다른 관객 분들에게도 그러한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었길 바라여 봅니다.
“원 세컨드”는 할많하않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오른 작품으로, 시대와 장인의 아우라가 뒤엉켜 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작품이었습니다. 장예모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이 작품이 어떤 가교가 될지, 여러모로 기대가 된 작품이기도 했구요. 개인에 깊이 빠져버린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어, 다시금 보다 광의적인 무언가에 대해 되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정말 오래간만에, 새벽녘에 쇠고기스프와 커피(그리고 다 못 적을 간식들)에 기대어, 이렇게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보았습니다.
예술과 삶, 그 어느 지점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저의 진심을 살포시 얹아서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