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기간 “오롯이 영화를 비추다”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저는 “오롯이 영화를 비추다” 오영비의 솔데입니다.
간만에 오영비를 통해 오롯이 비추어 드릴 영화는, 바로 팀버튼 감독의 “덤보” 입니다.
솔데의 오롯이 영화를 비추다
영화 덤보 리뷰
보다 너른 인간의 세상에서, 팀버튼이 그려낸 덤보의 비상
1941년 애니메이션 덤보
1941년 디즈니에서 선보인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덤보” 속 귀가 큰 코끼리 덤보의 이야기는, 제 또래에게는 동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판타지였습니다. 비록 덤보가 경험하게 되는 주된 고난과 성공이 인간 세상의 서커스단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고난과 성공의 많은 부분들은 동물들의 세상과 그들 간에 존재하는 순리로부터 비롯되고 이루어집니다.
덤보의 큰 귀는 코끼리 집단 내에서 흠이 되어 괴롭힘의 이유가 되지만, 현명하고 따스한 마음의 생쥐 티모시와 하늘을 날 줄 아는 까마귀들에 의해 덤보가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는 날개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덤보의 이야기는 2019년 팀버튼의 덤보에서 조금 달라지게 됩니다.
2019년 팀버튼의 덤보
2019년 약 80여년 만에 팀버튼 감독에 의해 재탄생된 실사영화 ‘덤보’는 애니메이션 덤보에서의 시선을 다소 확장시키며,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진 질서 속 또는 가치 안에서 비상하는 코끼리 덤보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바탕으로, 팀버튼 감독의 덤보는 원작과는 분명히 다른 결의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2019년 팀버튼의 덤보에서, 덤보의 고난, 성장 그리고 비상에 함께 하고 돕는(또는 유발하는) 이들은 모두 인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덤보의 과거(탄생),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인간에 의해, 인간과 함께, 그리고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보다 넓은 그리고 보다 너른 인간의 세상은 실사영화 속 덤보를 어쩌면 조금 달리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2019년 팀버튼의 덤보는 왜 이렇게 변하게 되었을까요?
팀버튼의 덤보 속 인간들의 이야기
팀버튼의 덤보 속 등장하는 인간들은, 크게 두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는 메디치 브라더스 서커스단의 단장과 단원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데비어 쇼비지니스 서커스단의 반데비어와 단원들입니다.
영화 속에서 극명한 악역으로 등장하는 반데비어와 일부 단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린 시절에 위태로운 곡예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였던 서커스단 단원들이 사실 그러하였듯) 다양한 한계 또는 결핍에 빠져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과, 가족의 부재, 그리고 평범함의 결핍 또는 종속되어 존재하는 관계 속에서의 위태로운 외줄타기와 같이, 덤보와 함께 하는 이들은 대게, 오리지널 덤보에서와 같이 결코 어떠한 방관자나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각자의 한계 또는 결핍에 한정되어 있거나 붙잡혀 있는 어찌 보면 아기코끼리 덤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오리지널 덤보에서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귀가 다르다는 이유로 덤보를 배척했던 코끼리들과 달리, 팀버튼의 덤보 속 따뜻한 인간들은 덤보의 행복을 위해 덤보를 안아주고 도와주며 때로는 덤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이익(성공)을 포기 합니다.
거대한 쇼비지니스, 반데비어의 세상에서 소모될 것 같았던 특별한 덤보
팀버튼의 덤보에서, 덤보에게 찾아온 위기-절정-결말은 총 두 차례입니다.
먼저, (오리지널 덤보에서 그러하였듯) 귀 큰 덤보가 태어난 후 한 못 된 서커스 단원에 의해 겪게 된 모진 수난과 그 과정에서 찾아온 엄마 점보와의 이별입니다. 그리고 오리지널 덤보에서는 이러한 수난과 이별이 해소되며 영화가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러나, 팀버튼의 덤보에서는 덤보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쇼비지니스의 거장 반데비어의 세상이 덤보를 뒤덮으면서 생기는 위기입니다.
각종 볼거리로 거대한 쇼비지니스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반데비어는, 자신의 쇼비지니스를 보다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투자를 유치하게 위해 덤보의 남다른 재능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 성공을 위한 과정에서, 덤보 뿐만 아니라, 메디치 브라더스 서커스단,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곡예사 콜레트 역시 모두 그저 하나의 발판처럼 이용되고 소모되려 합니다.
반데비어의 세상에서 덤보의 귀는 단순히 덤보의 특별한 그리고 남다른 재능이 아니라, 이용하고 소모될 대상 뿐이며, 덤보 역시 그 재능의 그릇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늘을 나는 재능을 지닌 덤보가 자신의 재능을 채 다 펼쳐내기도 전에 당도하게 되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의 세상은, 마치 오늘날 현실 세상의 거대한 쇼비지니스 또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이 텅 비어 그저 또다른 투자와 이익을 위한 발판들을 끌어당겨 모을 뿐인 거대 산업들을 묘사한 듯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온 세상이 (아마도) 그러하듯, 덤보는 반데비어의 세상에서 그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성공을 담보하는 대상으로만 취급 받으며 한정되고 소모되어 가는 듯만 싶습니다.
다름을 너머, 도사리고 있는 장막 뒤 현실
어릴적만 해도 우리는, 우리가 남다르더라도 재능을 갈고 닦아 그 재능을 펼쳐낸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님다른 재능을 통해 성공하고 빛이 나기도 합니다. 마치 애니메이션 덤보 속 덤보와 같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다름만을 극복한다면 행복한 내일을 만들 수 있으리라 꿈꾸게 되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차츰 그러한 남다른 재능이 또 다른 이들 또는 커다란 집단에 의해 이용 당하고 소모 당하며, 성공에 이어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최악의 결말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제 “다르다”는과 “재능을 꽃피우지못했다”는 것만이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이유로 이용 그리고 소모 당하고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것, 성공의 화려한 장막 뒤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접하고 깨어지며 우리는 동화 속 환상에서 벗어나오게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 서로를 위해 기꺼이 함께 한다는 것
“다름”의 편견을 이겨낸 덤보의 자유로운 ‘자신다운 재능’은, 서커스단 장막 뒤 현실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덤보의 비상은, 덤보의 남다른 재능과 자신다움을 펼치게 기꺼이 함께 하는 이들로부터 비롯됩니다.
덤보와 함께 하는 이들은, 삭막하고 냉혹한 세상 속에서 한계와 결핍에 종속되어 있지만 결코 자신을 잃지 않은 ‘부딪히고 성장하며 도전하는’ 이들입니다. 메디치 브라더스 서커스단의 단장과 단원, 그리고 반데비어 랜드의 콜레트와 집사 등 많은 이들은 덤보의 위기와 이러한 위기를 불러온 반데비어의 탐욕을 방관하거나 이러한 위기와 탐욕의 길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덤보를 성장시키고 도우며 또 자유롭게 하는 이들은, 앞서 설명된 삭막하고 공허한 현실의 시스템과는 분명한 대척점에 있는 ‘너른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와 결핍 그리고 두려움을 안고 기꺼이 덤보의 편에 섭니다.
그 순간, 그들은 서커스단의 단장, 단원, 일원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꺼이 함께 하는” 소중한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행은 특별한 덤보의 비상을 보다 높고 또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보다 자신답게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어쩌면 팀버튼의 덤보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이러한 관점에서, 어쩌면 팀버튼의 덤보는 어쩌면 덤보와 같은 존재였던 팀버튼 또는 그가 보거나 겪어온 어떤 이들 또는 대상이 겪어온 그리고 지켜온 세상 속의 자기 자신 또는 가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끝없이 팽창할 것만 같았던 꿈과 환상의 세상은, 사실 수많은 결핍과 한계를 짊어진 이들로 인해 받혀지고 있었고, 그 세상의 이면에는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탐욕과 실상은 텅 빈 삭막한 현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특별한 재능은 비록 성공을 가져다 줄 지 모르나, 나다움과 진정한 바람과 재능에서 빗겨나와 자신을 소모하게만 하고 그저 현실의 결말에 당도하며 만족하게 하는 수단으로 끝맺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는 그 세상을 짊어진 이들의 너른 인간다움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들은 비록 꿈과 환상에서처럼 고결하고 무결하진 않아 보일지 몰라도, 삶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며 이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희생하거나 이익을 포기하며, 누군가와 함께 합니다. 남들과 같거나 다르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그들의 동행은 가치가 있습니다.
오리지널 덤보에서 이러한 가치를 티모스에 한정지으며 덤보의 재능과 현명한 이의 조력으로 재능을 펼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면, 팀버튼의 덤보는 이러한 재능이 펼쳐진 후에도 존재하는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삶 그 자체를 비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 마칩니다.
이것은 꿈과 환상 속에 살아도 될 어린 시절 또는 안락의 시절을 지나, 세월을 따라 세상과 현실을 겪어온 이들을 위한 이야기만 같습니다.
실사영화 덤보가 그려낸 오리지널 덤보의 환상적인 재탄생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팀버튼 특유의 감성이 담긴 여러 장면들이 이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원작의 점보와 황새가 등장하는 씬을 재창조해낸 석양 씬과, 덤보가 겪는 환각 속 분홍 코끼리 씬을 재창조해낸 반데비어 서커스에서의 비눗방울 코끼리 씬은, (적어도 제게는) 원작에서 느꼈던 감흥을 분명히 뛰어넘은 가치 있는 정취를 이끌어냅니다.
어른들을 위한 덤보의 이야기를 위해 포기된 것들
물론 이런 중에, 원작과 비교했을 때 1+2편을 한 편에 담아낸 이야기 전개로 인해 뭉개진 많은 이야기들은 관객이 약간의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넘겨야 할 부분이긴 합니다. 덤보가 그저 괴상한 존재로서 겪는 수난과 그 수난 속에 결국 꽃피우는 재능으로 이어지는 전개의 축약은 그러한 장면 속에서 눈시울을 붉힐 준비를 하고 온 관객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등장인물들과 전개에서의 다 설명되지 않는 특징들은, 분명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팀버튼의 덤보를 만나야 할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엄마는 필요없어!”라고 한다면, ‘아, 이 인물은 어릴 적에 어머니와 관련된 아주 몹쓸 경험이 있구나.’라고 알아서 이해해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빛을 발하는 팀버튼의 덤보
그러나, 이러한 전개 상의 축약과 생략들은, 팀버튼의 덤보가 가진 가치와 헌사 그리고 위로의 빛을 잃게 하지는 못하리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또는 겪어낸 이들에게, 이 동화 속 덤보 그리고 ‘메디치 패밀리’의 모습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아니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 싶은 아름다운 존재들입니다. 실사영화 덤보는 (제 시각에서는) 분명히 ‘어른들을 위한 동화’입니다.
보다 너른 세상이 있게 하는,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소중함을 아는 모든 어른들을 위한 동화입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새로운 팀버튼의 시작이라면 기꺼이 반길, 반대로 팀버튼의 종장을 향한 시작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쳐 줄 진솔한 이야기가 아닐까 조심히 말씀드려 봅니다.
여전히 빛이 나는 디즈니에게
끝으로, 근래의 디즈니의 (많은 이들의 우려를 사는) 어마어마한 확장 속에서, ‘디즈니’ 사가 팀버튼의 덤보가 이야기하고 있는 가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감수해낼 마음으로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준비하고 있길 조심히 바라여봅니다.
근래 많이 힘들고 지친 가운데 만난 덤보는, 제게 분명 가치 있는 위로였다는 쑥스러운 감상으로 리뷰를 마쳐봅니다.
감사합니다.